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정왕후 조씨 (문단 편집) === 왕대비 === [[효명세자|남편]]이 [[조선/왕사|왕]]이 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[[왕비|중전]]이 되지는 못했지만, 아들 [[헌종(조선)|헌종]]이 [[조선/왕사|왕위]]에 오르자 아버지 [[효명세자]]를 '''익종(翼宗)'''으로 [[추존|추숭]]함에 따라 어머니인 그녀도 [[왕비]]를 거치지 않고 바로 [[왕대비]]가 되었다. [[1836년]](헌종 2년), '''효유왕대비(孝裕王大妃)'''의 [[존호]]를 받았다. >'''대왕 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다''' >---- >대왕 대비전에 '''문인(文仁)'''의 존호(尊號)를 가상(加上)하고, >왕대비전에 '''효유(孝裕)'''의 존호를 올렸는데, 존숭(尊崇)하는 것이었다. >---- >- '''《[[헌종실록]]》 3권, 헌종 2년([[1836년]], 청 도광(道光) 16년) 10월 11일 (신유) 2번째기사''' [[조선/왕실|왕실]]의 최고 어른이자 시어머니인 [[순원왕후]](문인명경대왕대비)만큼은 아니지만, [[대비]]이자 [[헌종(조선)|왕]]의 [[어머니|생모]]로서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겼기에, 그녀의 친정 가문인 [[풍양 조씨]]는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만큼은 아니지만 [[세도정치]] 기간 동안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. [[헌종(조선)|헌종]] 시기, '''결국 시가인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와 친정인 [[풍양 조씨]] 두 가문에 의한 [[세도정치]]가 자행되었다.''' 어떤 면에선 [[소혜왕후]]([[인수대비]])와 비슷한 케이스.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동안 [[풍양 조씨]]가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를 적대하거나 압도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.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의 천하가 된 [[철종(조선)|철종]] 연간에도 [[헌종(조선)|헌종]]이 총애한 조병헌을 제외한 [[풍양 조씨]]들이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 정권에 의해 해코지 당한 적이 없으며,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가 사실상 만든 《[[헌종실록]]》이나 《[[철종실록]]》에도 [[조인영]], [[조만영]] 등 [[풍양 조씨]] 유력 인물들이 우호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가문이 적대적인 사이는 아니었다.[* 단지, [[신 안동 김씨|안동 김씨]]와 [[풍양 조씨]] 두 가문에서 [[조선/왕사|왕위]] 관련, 혹은 [[왕비|중전]]의 자리를 누구의 가문에서 낼 것인가, 또는 주요 관직에 누구 가문 쪽 사람을 많이 앉힐까에 정치적으로 경쟁, 견제하는 스타일이지, 사극 드라마나 영화 등 각종 매체에서 나오는 '자기 가문을 앉히기 위해 상대 가문을 죽이거나 유배보내는' 그런 행위는 각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또 보이지 않는다.] 한편 [[1847년]](헌종 13년), 40세를 맞이하여 [[창덕궁 인정전]]에서 [[생일]]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. [[헌종(조선)|헌종]]이 직접 치사(致詞)와 전문(箋文), 표리(表裏)를 올렸다. 그러다가 [[1849년]](헌종 15년)에 [[헌종(조선)|헌종]]이 후사없이 갑작스럽게 이른 나이에 [[죽음|승하]]하면서 [[정조(조선)|정조]]계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자, 시어머니인 [[순원왕후]]는 [[조선/왕실|왕실]]의 최고 어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[[강화도]]에서 [[유배]]생활을 하면서 나무를 캐던 강화도령 [[철종(조선)|철종]], 즉 [[사도세자]]의 증손자이자 [[전계대원군|전계군]]의 서자(3남) 이원범을 [[순조]]와 [[순원왕후]]의 [[양자(가족)|양자]]로 입적 후 덕완군(德完君)으로 봉군하고 [[조선/왕사|왕위]]에 옹립하였다. [[헌종(조선)|헌종]] [[죽음|승하]]시 [[영조]]의 후손은 [[전계군|전계군 이광]]의 아들인 [[철종(조선)|철종]]밖에 남지 않았다.[* [[조선왕조실록]]-'''《[[헌종실록]]》 16권, 헌종 15년([[1849년]], 청 도광(道光) 29년) 6월 6일 (임신) 14번째 기사'''에 따르면, “[[종묘|종]][[사직|사]](宗社)의 부탁이 시급한데 [[영조|영묘조(英廟朝)]]의 핏줄은 [[헌종(조선)|금상(今上)]]과 강화에 사는 [[철종(조선)|이원범]]뿐이므로, 이를 [[종묘|종]][[사직|사]]의 부탁으로 삼으니, 곧 [[전계대원군|광]](㼅)의 셋째 아들이다.”라고 기록되어 있다. 물론 엄밀히 따지면 [[철종(조선)|철종]]의 이복형 [[영평군(1828)|영평군]]과 [[은언군|은언군가]]의 종손인 [[익평군]]이 있긴 했는데 어차피 이 둘도 처지는 [[철종(조선)|철종]]하고 똑같았던지라 별 의미가 없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